스승님의 생각 - 나폴레옹과 부하들의 신뢰

유럽 전역을 치열한 전쟁 속에 몰아넣은 나폴레옹은 연전연승하면서 부하들로부터는 “나폴레옹은 승리만 있다.”라고 하면서 깊은 신뢰를 얻었다.
1814년 3월 30일, 나폴레옹이 파리에 없는 사이에 진격한 브르헤르(Bluecher)(Bluecher)군에 의해 파리가 점령을 당하자 나폴레옹은 파리 탈환을 포기하고, 4월 11일 루이(Louis) 18세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2주일 후에는 엘바(Elba)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유럽 전역을 치열한 전쟁 속에 몰아넣은 나폴레옹은 연전연승하면서 부하들로부터는 나폴레옹은 승리만 있다.라고 하면서 깊은 신뢰를 얻었다. 1814년 3월 30일, 나폴레옹이 파리에 없는 사이에 진격한 브르헤르(Bluecher)(Bluecher) 군에 의해 파리가 점령을 당하자 나폴레옹은 파리 탈환을 포기하고, 4월 11일 루이(Louis) 18세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2주일 후에는 엘바(Elba)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엘바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감옥의 죄수생활이 아니라 엘바 섬의 모든 것을 직접 경영하고 나름대로 작은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 즉위한 루이 18세가 무능하고 국제정세가 점점 혼탁해지고 불란서가 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영국군 감시가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충실한 부하 1천 여 명을 데리고 엘바 섬을 탈출하여 3월 13월 1일 아침에 칸느 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파리를 향하여 북상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루이(Louis) 18세는 군대를 보내 그를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하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있던 나폴레옹인지라 보내는 군대마다 과거의 자기들 사령관이었던 나폴레옹에 합세하였다. 나폴레옹을 체포하여 마차에 싣고 오겠다고 약속한 네이(Ney) 장군도(Ney) 옛날의 신뢰를 잃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합세해 버리고 말았다.
이때 네이 장군과 그의 병사들은 나폴레옹을 보자 “황제 만세(Vive L'empereur!)"를 함께 외쳤다. 이리하여 나폴레옹은 그해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하여 즉시 40만의 대 병력을 집결하여 다시 한번 동맹국과 겨룰 기회를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비록 워털루 Waterloo 전역(벨기에 지역)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Wellinton 장군에게 패하여 샌트 헤레나 St. Helena 섬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위암으로 1821년 5월 5일 사망했다.
어떻게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 3월 1일 칸느 동쪽 해안에 상륙하여 3월 20일, 불과 20일 만에 40만의 대병력을 규합하여.파리에 무혈입성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루이 18세의 무능과 국제정세가 혼탁해지고, 조국 불란서가 위기에 봉착한 것을 보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애국심,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나폴레옹이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폴레옹의 부하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그의 부하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그 한 예를 소개한다. 이태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만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을 때, 병사들이 어느 전선에서 숙영을 할 때 한 병사가 지쳐서 보초를 서다가 잠이 들었다.
마침 숙영지를 순찰하던 나폴레옹은 잠이 든 병사를 발견하고는 부관 자네가 저 병사가 깨어날 때까지 보초를 대신 서주게. 계속된 행군으로 지친 병사를 이해한 나폴레옹다운 처사다.
그가 남긴 말 중에부하는 부려먹는 대상이 아니라 대접하는 대상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은 나름 어느 분야든지 간에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철학, 가치관이 있었다. 그런 가치관이 그를 위대한 명장, 성인으로 남게 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주역 괘 종 15번 괘가 지산겸(謙) 괘이다. 높이 오르거나 재물이 많아질수록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자만이 최종적으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아 왔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