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봉(活人峰)에서의 개안(開眼)
노관(老冠)은 기독교 신자였다. 그거 아마도 초등학교 때부터 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동네 교회를 다니던 누이의 영향을 받아 동네 친구들과 놀기 위해 교회를 다녔다. 방학 때는 여름 성경학교를 하기도 하고, 야외 수련회를 다니기에 그냥 이런 모임에 다니는 것이 노관에게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덧 세월이 지나 우연이 필연인지라, 이렇게 주역을 강의하는 삼산도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이름을 바꾸고 새로이 노관(老冠)이라는 호를 삼산 스승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삼산(三山) 은 목우당의 당주(堂主)이자, 도인의 길을 걷은지 30여 년이 된 사람이다. 지금의 부인을 계해년에 만나 8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리고 활인봉에서 개안(開眼)이 된 이후 대전에 본부를 둔 증산도에서 10여 년간 총무원장 등을 경험한 인물이다.
삼산(三山)은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주야리에 있는 주렴산 밑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51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보령농고를 졸업 이후에 뜻한 바가 있어 3사관학교를 3번 만에 도전하여 임관을 했다.
임관 당시 삼산(三山)은 통신병과로 1사단에 보직되어 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0여년의 군생활중 뜻하지 않은 보안사고에 휘말려 더 이상 군생활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이미 작고하신 할아버지 정산(井山)의 유훈대로 도(道)의 길을 가게 되었다.
삼산의 할아버지 정산(井山) 역시 당대에 알려진 도인이었다. 흔히 도인은 불고가사(不考家事)라, 전혀 집안일을 챙기지 않고 세상을 주유하며 이미 오래전 성인과 조상들이 이야기한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삼산이 태어난 이후 집에 정착하였다. 그것은 본인이 꿈꿔오던 세상을 본인의 손자인 삼산이 이뤄낼 것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할아버지의 뜻을 알았던 삼산 역시 본인이 가야 할 길을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한 삼산은 갓 태어난 딸 금란과 아내를 남겨둔채 마곡사가 위치한 태화산 아래의 활인봉으로 입산수행차 들어갔다. 때는 초봄이었다. 산의 기온은 낮에도 다소 쌀쌀한 날씨를 보였다. 그러니 밤과 새벽은 오죽했으랴. 지금처럼 제대로 된 산행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산에서 임시거처할 움막을 짓고 밤낮으로 정신수행에 매두무진을 하였다.
그러던 중 채 1주일이 지났을까? 삼산은 새벽수행을 위해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 활인봉 바위에서 내려오는 물에 세수를 하기 위해 얼굴을 들이 밀었다가 그만 본인의 눈에서 나오는 광채에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파란 서광이 본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옴을 그제서야 인지했으니 놀랄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흔히 일반사람이 도통했다고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삼산 자신은 이를 초통(初通)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초통이란 창호지 문에 바늘구멍을 뚫고 보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날부터 삼산은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영적으로 세상이 보였고, 잠을 자는 시간에도 하늘에 일진만상(一塵萬象)이란 선명한 글자가 보였다. 그리고 낮에도 눈을 감으면 본인이 수행하는 활인봉으로 부친인 중산(中山)이 무언가를 잔뜩 짊어지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처음 겪는 일이라 긴가민가 하기만 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부친이 올라오는 모습을 현실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삼산(三山)은 현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원했다. 그래서 더 수행에 매두무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태화산 산신(山神) 은 더 이상 삼산의 수행을 허락치 않았다. 이런 산신(山神) 의 생각을 삼산 자신 역시 알 수 있었다. 결국엔 활인봉 아랫마을 사람 10여 명이 올라와 수행 중인 삼산을 산밑으로 강제로 끌어내 버린 것이다.
삼산(三山)은 생각했다. 이후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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